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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390-870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 644-1
대표(043)651-4527팩스(043)651-9317
웹사이트www.baeron.or.kr
성지 배론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입니다. 배론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습니다.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회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전례된지 얼마 안 되어 1791년 신해교란이 일어나자 교우들이 심심산골인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농사와 옹기 구이로 살아가며 6개의 교우촌을 이루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황사영 알렉시온은 1774년 당시 유명했던 창원 황씨 가문에서 나고, 자는 덕소요, 어려서부터 홍명과 재덕이 남달리 뛰어나 이미 16세에 과거를 보아 진사에 장원 급제 하였습니다.

정조대왕이 그를 탑전까지 불러 올려 기특하고 귀엽게 여겨 그를 어루만지고 그의 손목을 붙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네게 높은 벼슬을 주고 네게 나라의 큰 소임을 맡기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영은 임금님이 만지신 손목을 붉은 비단으로 감아서 만지지 못하게 하였고,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 나라에서 유명했던 마재 정씨 가문을 찾아 악종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정약종은 이미 천주교를 믿고 있었으며 그의 성세 본명은 아오스딩이고 명도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사영의 지혜와 총명에 실로 놀라마지 아니하였고 나라의 큰 벼슬을 하도록 가르치기 보다 장차 교회의 큰 일꾼을 만들 야심으로 사영의 심리동태를 오랫동안 면밀히 살펴 보았다.

사영은 약종의 형인 약현의 장녀와 결혼하고 선생이요, 처삼촌인 아오스딩으로 부터 이미 감화되어 성교의 진실함을 터득하였고, 주문모 신부께로 인도되어 영세 입교하여 알렉시오의 세례명을 받았다.

알렉시오는 이때 부터 세속의 공명과 영화는 뜬 구름같이 여겨 교리 연구에만 열중하였고, 교회 안에서도 회장직을 맡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는 임금의 총애와 특혜에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정조대왕은 사영이 천주학은 신봉한다는 소식에 적이 못마땅하게 여겨 불쾌한 듯 하였으나 젊은 사람이 공명을 그처럼 마다함에는 속으로 깊이 감탄하였다.

임금의 사랑을 톡톡히 받게 될 사영에게 크나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그의 친인척들은 몹시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그 해 정초에 지명수배되어 스승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이곳 저곳 도피하다 10일 이내로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의 길을 떠났다.

남이 자신을 알아보기 쉬웠던 탐스러운 수염을 자르고 상복을 입고 2월 15일, 서울을 빠져나와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마침내 제천 배론 교우촌에 숨어 들었다. 이곳에서 '이상주'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옹기정 옆에 토굴을 파 그 속에서 8개월간 은거하며 김한빈(베드로)와 황심(토마스)를 외부 연락원으로 교회 소식을 듣고 하였다.

8월 23일 황심으로 부터 주 신부의 자수와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낙심 천만 끝에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북경 주교께 올리는 탄원서를 명주에 써 옷 속에 넣어 황심과 옥천회를 시켜 북경으로 보내기로 계획을 짰는데 9월 25일 황심이 먼저 잡히고 4일 후 사영이 잡힘으로 백서는 물론 모든 비밀이 그 주인(황사영)과 함께 포도첨으로 압송되었다.

10월 3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23일간 취조와 형벌 끝에 11월 5일, 대역부도 죄인으로 29세의 나이에 극형에 처단 되었다.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에 둘도 없는 흉한한 글이라고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 속에 집어 넣어 근 백년 동안 숨겨오다 1894년 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 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라며 간직해 두었다 그의 친구의 천주교인 인건영(요셉)에게 넘겨주고 이씨는 민 주교께 바쳤던 것이었다.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민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하였다. 민 주교는 1924년 이 이백서의 실물 대사본 2백여 매와 불문 번역본을 그 때 교회내외 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조선 총독부 시대 일본인 야마구지가 1926년에 배론을 답사하고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 씨 집 뒷뜰 안에 있다. 여기는 1866년 박해에 처형된 불국인 부루띠에 신부가 1858년경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이 약 1미터 반, 양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장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 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견해서 옹기굴의 요적임을 주찰 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1) 구학리 646번지가 바로 신학당이 있었던 자리고 1976년 10월 18일 제천군에서 발행한 지적도 등본으로 확인 되었고,

2) 야마구지가 답사할 때 집주인 최재현씨가 1858년 경의 신학교 교사였음을 확증하였고,

3) 이 집 뒤뜰 안에 옹기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했다.

이 646번지 옛 신학당 터에 옛집과 그 위 사당 건축공사에 최근 1978년 11월 11일, 지붕 기와 밑에 깔 흙을 올리기 위해 옆 땅을 헤쳤는데 아주 까맣게 탄 돌들이 나왔고 그 밑에는 좋은 진흙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 위에는 옹기 가마 자리로 알아볼 수 있으리만치 엇비슷한 언덕에 중간 양쪽으로 얕은 돌담이 3층으로 쌓여 있고 맨 꼭대기에 땅이 꺼진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수목이 자라있지 않고, 2~3년 전에 심은 소나무가 여기저기 있을 뿐이다. 여기가 옹기가마와 토굴 자리임이 틀림 없다고 본다.

황사영이 1801년에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 하고, 그 후 50여 년 후 646번지 장낙소 살림집에 신품 학당이 시작되었는데 그 집을 장 요셉이 지었는지, 원래 부터 있었던 집을 사서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처음부터 있던 집이라면 김귀동이 지은 집이 토굴 터 였을지도 모른다. 일본인 야마구지가 다녀간지도 벌써 50여 년이 지났고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 공사를 하면서 신학당 자리에서 3~4미터 앞에 담장을 쌓으려고 기초를 팠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자갈과 모래만 나왔다. 그것으로 보아 1850년 대에는 개울이 학당 지척에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때 학생들이 소리내서 공부를 하지 못했음을(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해서) 가히 알 수 있다. 오늘의 개울은 학당에서 90m 밖에 흐르고 있다. 현재의 토굴은 1988년에 복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