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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강론
원주교구 작성 17.11.10 10:36 조회 84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위한 희년 미사 강론

성 베드로 대성전, 2016년 11월 13일(연중 제33주일)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제1독서에서 들은 말라키 예언자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지내는 희년을 비추어 줍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이는 주님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두며, 그분 안에서 인생 최고의 선익을 보고 자기 자신과 자기 이익만을 위한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한 그 사람들에게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약속하신(마태 5,3 참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며, 하느님께 말라키 예언자를 통하여 “나의 소유”(말라 3,17)라고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는 이들을 거만한 자들, 곧 자기만족과 자신의 지상 소유물 안에서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대비시킵니다. 구약성경의 이 마지막 부분은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도전적 질문들을 내놓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안위를 찾고 있는가?’ ‘주님 안에서인가, 아니면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유형의 안위들에서인가?’ ‘나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고, 나의 마음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생명의 주님인가, 아니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덧없는 것들인가?’

오늘 복음에도 비슷한 질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지상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간, 곧 죽음과 부활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계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루카 21,5) 성전 지역에 계십니다. 사람들이 그 성전의 아름다운 외관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주님께서는 전쟁, 기근, 땅과 하늘의 격변이 곳곳에서 일어나리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가장 튼튼한 나라들, 지극히 거룩한 건축물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다는 것들조차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고, 조만간 사라지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곧바로 스승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언제와 어떤 표징…. 우리는 끊임없이 호기심에 이끌립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 시간을 알고 싶어 하고, 표징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호기심에는 신경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거짓 설교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파멸에 관한 예언, 터무니없는 점성술, 또는 참으로 중요한 것들에 대한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위협적 설교와 예측들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소음들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거짓 영에게서 나오는 것을 구분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날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지혜의 말씀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분열과 두려움을 조장하려는 사람들의 외침을 구별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어떠한 시기에라도,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에게 닥칠 극심한 시련과 불의에 직면해서도 그러한 변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로이 선에 머물며,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중한 소유, 곧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에 관하여 물으십니다. 한 가지 이미지를 사용하자면, 이 독서들은 우리 인생의 물살이 거쳐 지나가는 “체”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들은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 지나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체”에 걸린 귀중한 보석들처럼, 남겨진 보배로운 실재들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오래 지속될까요?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라지지 않는 보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두 가지, 주님과 이웃입니다. 이 두 부요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둘은 사랑받아야 하는 가장 위대한 선입니다. 이 밖의 모든 것은, 하늘도 땅도 아무리 아름다운 것들도 심지어 이 대성전까지도 모두 사라질 것이지만, 우리 인생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배척을 언급할 때, 우리는 곧 구체적인 사람을 생각합니다. 사람은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인격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의 정점에서 만드신 인간은 종종 버려지거나 덧없는 것을 선호하여 무시됩니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인간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이러한 거부에 익숙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마비되어서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거나 우리 세상의 심각한 문제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걱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단지 저녁 뉴스에서 흔히 되풀이되는 소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의 희년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주파수를 맞추고 그분께서 보시는 것을 함께 보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만을 보지 않으십니다(1사무 16,7 참조). 오히려 그분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이사 66,2), 곧 오늘날의 수없이 많은 가련한 라자로들을 굽어보십니다. 배척받고 버림받은 라자로를 알아채지 못할 때에, 우리는 자신에게 얼마나 큰 해를 입히고 있습니까(루카 16,19-21 참조)! 그것은 바로 하느님 께 등을 돌리는 일입니다. 사랑의 대상이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산되는 물품들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영적 경화의 증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적 모순의 기원입니다. 발전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가능성도 증가하지만, 또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종말이 언제 일어나고 어떤 표징이 있을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심각한 불의입니다. 라자로가 문 앞에 누워 있는데, 집에서 평온하게 자기 일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집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부자들의 집에도 평화는 없습니다. 

오늘 전 세계 주교좌 성당과 성지에서 자비의 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청하는 우리 이웃에게 눈을 감아버리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거짓과 두려움의 이미지들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의 눈을 정화하고, 인간적 교만과 두려움의 투사(投射)인 힘과 징벌의 하느님이 아닌 참 하느님께 우리 눈을 열도록 합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라는 말씀을 확신하고, 자비의 하느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분께 의탁합시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참된 생명, 사라지지 않을 그 생명, 주님과 성도들이 함께 친교를 나누며 영원히 끝없이 지속될 기쁨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생명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합시다. 

그리고 눈을 열어 우리의 이웃, 특히 잊히고 배척된 형제자매, 우리 문 앞에 누워 있는 “라자로”를 바라봅시다. 그곳이 교회의 확대경이 가리키고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어 그 확대경을 우리 자신 쪽으로 돌리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덫으로부터, 이익과 특권으로부터, 권력과 영광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세상의 영에서 오는 유혹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 어머니인 교회가 “특히 고통받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이 사람들이 복음적 권리로써 교회에 속하여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 개막 연설, 1963년 9월 29일). 진정한 보배인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복음적 권리뿐 아니라 복음적 의무를 지닌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성찰에 비추어, 저는 오늘이 “가난한 이의 날”이기를 바랍니다. 옛 전승이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로마의 순교자 라우렌시오 성인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혹독한 순교의 고통을 받기 전에, 자신이 교회의 참된 보화라고 묘사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진정한 보화에게로 우리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빕니다.